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형주 공방전/평가 (문단 편집) === 형주 관리 === 이 설의 대표적인 것은 바로 [[무릉만]]이 문제인데 주요 근거가 촉한 세력은 이민족들과 매우 친했다는 것과 그들을 자신들의 세력으로 끌어들였다는 것과 [[이릉대전]] 때 [[마량]]이 비단을 바리바리 싸들고 가서 오계만이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이고 그들과 친분을 맺어 마량이 거주하는 치소까지 현지 주민들 주도하에 건설하게 한 것(수경주)이다.[* [[자치통감]]에서 이릉 대전의 기사 뒤에 마량도 오계만에서 죽었다고 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누가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만 마량 가장 가까운 군대가 익양에서 유비의 지원군을 막고 있던 [[보즐]]. 또한 무릉의 종사였던 [[번주]]가 무릉의 이민족과 영합하고 [[습진(촉한)|습진]]과 약속을 정해 거병했다가 손권에게 격파된 이후 습진은 다시 영릉의 7개현을 점령하고 소릉태수를 칭하면서 군대를 이민족 지역의 경계에 주둔시켰으나 이전에 관우 수하에 있던 부하 중 [[반준]]이 당시 이을 토벌했다. 영릉과 계양의 군대는 결국 유비에게 호응하지 못하고 있다가 유비 퇴각 후 [[보즐]]에게 진압되었다고 한다. 즉 유비가 자력으로 차지했던 형남 4군 중에서 3군이 [[유비]]가 진격하자 호응하려고 했다는 의미고 이 지역의 상당수의 무릉만이들이 여기에 호응했다는 정황이 드러난다. 이렇듯 보즐과 반준이 형남 일대에서 대대적인 친촉 반오 세력 봉기에 맞서 군사 활동을 한 정황이 있는데 마량이 후퇴 중 혼란에 죽었다는 것은 맞겠지만 꼭 무릉만에 죽었다는 근거는 부족하다. 그리고 적어도 이런 상황을 보면 [[유비]]가 적벽부터 형주 공방전, [[이릉대전]]까지 형주 인심을 [[오나라]]보다 더 잘 잡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유비 10만 형주 민간인 남하 사건을 굳이 대지 않더라도 당장 [[노숙]]부터가 [[유비]]에게 땅을 빌려줘야 한다는 명목 중 하나가 이 지역에서 오나라가 민심을 못 잡았다고 대놓고 실토하는 마당인데 더 설명이 필요한지? 물론 [[관우]] 공격 이후 [[여몽]]이 남군에서 군율에 엄정하고 관용을 베푸는 통치로 인심을 안정시켰다지만 그 순간에도 [[육손]]은 촉 휘하 형주 각지의 저항 진압 및 항복 작업, 호족들이 이끄는 이민족 토벌을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또 [[유비]] 통치 시기에 유비가 직접 무릉에 주둔했고 이 시기 무릉만이 촉 상대로 변란을 일으켰다거나 하는 기록은 없으며 어쨌거나 [[이릉대전]] 당시 무릉만이가 촉한 쪽에 호응한 것은 사실이다. 무릉만에 한정하지 않고 이민족들로 범위를 넓히면 남군 공방전 때 [[관우]]가 패한 다음에 남군(南郡) 일대 산과 계곡에서 거주하던 만이(蠻夷)들이[* 무릉만 보다는 면중만일 가능성이 높기에 따로 서술] 악진에게로 와서 투항하는 등 결코 [[관우]]도 이민족 통치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애시당초 남군 위에 있던 고을과 부락이 위나라에 항복하는데 이 근처에 사는 만이들이 위나라에 항복하는 건 전쟁 중인데 [[관우]]의 통치와는 상관없이 충분히 있을만한 일이다.[* [[유비]]가 통치하던 시절에도 황개가 무릉만이를 물리치는 등 유비가 그들을 건드린 기록은 없지만 이미 무릉만이들은 통치 세력에 반발했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것은 당시 무릉이 [[손권]] 땅이라고 하거나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215년 이후 기록이라고 하면 해결된다.] [[관우]]의 정치에 대해 좋은 말을 찾는다고 하면, [[여몽]]이 [[육손]]에게 형주를 치기 위한 의도를 설명하면서 했던 짐짓 했던 말인[* 이 부분에 대해 [[자치통감]] [[호삼성]]의 주석에선 둘러댔다는 설을 지지한다.] '그는 벌써 형주를 점거하고 은혜와 신의를 대대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아울러 원래 공로가 있으며 담력과 기세가 성대하여 도모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가 있지만 이 말 하나로 [[관우]]의 통치를 세세히 살핀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사실 [[여몽]]이 [[관우]]는 용맹하다던가, 학문을 좋아하고 강직하고 웅대하고 남에 위에 서길 좋아한다던가, 매섭고 빼어난 장수라고 판단했다던가 하는 식으로 관우에 대해서 고평가한 적은 전에도 있었다. 관우를 상대로 겉으로나마 우호를 닦아 기회를 엿본 것도 이런 [[관우]]가 다스리는 형주에서 오를 철저히 경계하고 방비하니 이를 방심시키기 위함이었다.] 사대부나 일반 병졸 쪽으로 나가면 장비전에는 관우가 사대부에게는 교만하지만 병졸들에겐 잘해주었다라 되어 있다. 다만 이후 남군성 사람이 처음엔 [[여몽]]의 진입에 반발하여 계략을 짜다가 진압당한 장면을 보면 [[관우]]의 통치가 민심을 처음부터 이반시킬 정도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관우가 통치하던 백성들이 여몽이 남군을 점령하고 평소보다 은혜를 후하게 베푸는 정치를 펴 다스리자 병사들에게 이를 말하기까지 한 부분은 그만큼 [[여몽]]의 군정이 탁월한 면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익양 대치 때는 장사, 계양의 두 군이 여몽의 편지 한 장에 항복한 것을 관우의 통치 문제로 보기도 하나 애시당초 이 두 군이 항복한 것은 편지 한장에 그냥 넘어간 게 아니라 [[손권]]이 [[여몽]]을 파견해 선우단, 서충, 손규 등의 병사 2만 명을 지휘하여 장사, 영릉, 계양 세 군을 취하도록 하고, [[노숙]]으로 하여금 1만 명을 인솔하여 파구에서 주둔하며 [[관우]]를 방어하도록 한 상태에서 군을 동원해 편지로 항복시킨 것이므로 통치 문제로 보긴 어렵다. 학보가 여몽의 [[공갈]]에 속아 항복했으며 [[관우]]가 죽을 때는 사인이 우번의 내응이 있다는 말에 항복하고[* 그러나 사인은 오서 측 기록해보면 분명 성을 처음엔 지켰다고 되어 있다. 분명 관우랑 사이가 안 좋은 건 사실이었긴 하나 무조건 배신자로 몰기엔 무리가 있다.] 미방은 아예 내통하여 형주의 수비가 쉽게 뚫리도록 도움을 주어 이게 형주가 바로 항복하는 원인을 제공했으므로, 부하들의 행보를 보면 인선 쪽에서 부족했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나 형주 탈취 당시 저항하거나 촉으로 도주하거나 협조를 거부한 [[관우]]의 관리들도 있었고 몇몇 관리는 관우가 죽은 다음에도 저항했으므로 꼭 그렇다고만 볼 순 없다. 그리고 공신 반열에 들고 [[유비]]의 인척이었던 미방의 내통을 과연 누가 예상하겠느냐는 반론도 나올 수 있다. 거기에 이것에 대해 애초에 이러한 책략은 공격 시작하고 부랴부랴 준비해서는 신속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익양 대치나 [[관우]] 공격 때의 신속한 점령은 [[손권]]이 미리 형주 일대에 광범위한 정보 공작을 펼쳐서 만일의 상황에 대비 해두었던 성과를 얻은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미방]]의 내통이 형주 탈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만 봐도 그러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